군부 독재 시절, 한국 교회의 선택: 침묵과 저항 사이

군부 독재 시절(1961~1987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정치적 억압과 민주화 운동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시기다. 이 시기 한국 교회는 독재 정권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취하며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 일부는 정권에 협력하거나 침묵했지만, 다른 일부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서 저항의 목소리를 냈다. 이러한 양면성은 한국 교회의 역사적 정체성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 독재 정권과의 협력: 침묵의 선택

군부 독재 초기, 많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정권에 협력하거나 침묵하는 태도를 보였다. 1961년 박정희가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주요 기독교 지도자들은 미국을 방문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이는 반공주의와 경제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정권과 교회 간의 유착 관계를 형성한 사례로 평가된다.

특히,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불교를 강조하며 기독교와 갈등을 빚었지만, 이후 기독교의 반공 이념과 정권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관계가 개선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은 교회의 예언자적 역할을 약화시키고, 사회 정의 실현이라는 본연의 사명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 박정희 쿠데타 이후 기독교 지도자들의 정권 지지
  • 반공주의를 매개로 한 교회와 정권의 유착
  • 예언자적 역할 상실과 비판

2. 민주화 운동의 중심: 저항의 목소리

반면, 일부 진보적 기독교 세력은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1973년 ‘남산 부활절 사건‘이 있다. 이 사건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박정희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배포하며 저항했다. 이로 인해 박형규 목사 등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었지만, 이는 학생 운동과 시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기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긴급조치와 고문 등에 맞서며 민주화 투쟁을 이어갔다. 국제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한국의 상황을 세계에 알리고, 민주화 운동을 조직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한국 교회가 단순히 종교 기관을 넘어 사회 정의 실현의 도구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 ‘남산 부활절 사건’ 등 독재 체제 저항 사례
  • 국제 네트워크를 통한 민주화 운동 지원
  • 사회 정의 실현에 앞장선 진보적 기독교 세력

3. 분열된 교회의 모습: 보수와 진보

군부 독재 시절, 한국 교회는 정치적 입장 차이로 인해 보수와 진보로 분열되었다. 보수 교회는 반공주의와 경제 성장을 이유로 독재 정권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국가조찬기도회 등을 통해 독재자를 찬양하기도 했다. 반면, 진보 교회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하며 정권에 맞섰다.

이러한 분열은 신학적 차이보다는 정치적 입장 차이에 기인했다. 이는 군부 독재 이후에도 지속되어 한국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달라진 교회의 태도는 신앙 공동체로서의 일관성을 약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 보수와 진보로 나뉜 교회의 정치적 입장
  • 보수: 반공주의와 경제 성장 중심
  • 진보: 민주주의와 인권 옹호
  • 분열된 교회의 지속적 영향

맺음말

군부 독재 시절 한국 교회의 행보는 침묵과 저항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일부는 정권과 협력하며 안정 속 성장을 추구했지만, 다른 일부는 민주화 운동의 한 축으로서 사회 정의를 외쳤다. 이러한 양면성은 한국 교회의 역사적 역할과 책임을 재조명하게 한다. 오늘날에도 당시의 경험은 종교가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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