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의 목적과 바울의 접근 방법

들어가며

로마서는 바울 서신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신약성경의 가장 순수한 복음”이라고 불렀던 이 서신은, 바울이 아직 방문하지 않은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학의 가장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제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다른 바울 서신들이 대부분 특정한 문제나 위기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의 성격을 띠는 반면, 로마서는 복음의 핵심을 차근차근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신학적 대작입니다. 이는 바울이 로마 교회와의 관계에서 가지고 있던 특별한 상황과 목적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목적

A. 바울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

바울의 로마서 집필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선교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로마서 집필 당시 바울은 제3차 선교여행을 마무리하면서 예루살렘 교회와의 관계 정립, 이방인 선교에 대한 정당성 확보, 그리고 새로운 선교 지역으로의 확장 등 복합적인 상황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1. 서바나 선교 계획과 로마 교회의 역할

바울은 로마 교회를 경유하여 서바나(현재의 스페인) 선교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서바나는 로마 제국의 서쪽 끝에 위치한 미개척 선교지였으며, 바울에게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실현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계획을 위해 바울은 로마 교회의 지원과 협력을 얻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경제적 후원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선교 사역의 정당성을 명확히 제시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로마 교회가 바울의 복음 이해와 선교 방법론에 확신을 가져야만 진정한 파트너십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5장에서 이러한 의도를 명확히 드러냅니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노니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의 전송을 받아 그리로 가기를 원하노라”(롬 15:23-24).

2. 갈라디아와 고린도 상황의 영향

바울의 이전 사역 경험, 특히 갈라디아 교회에서의 유대주의자들과의 갈등과 고린도 교회에서 나타난 각종 문제들이 로마서의 내용 구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유대주의자들과 격렬하게 대립했습니다. 이들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할례와 율법 준수를 요구했고, 바울의 사도권을 공격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바울은 복음의 핵심인 이신칭의 교리를 더욱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영적 우월감, 분파주의, 도덕적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복음의 교리적 측면뿐만 아니라 실천적 적용까지 포괄하는 체계적 설명의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3. 예루살렘 교회와의 관계 및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

로마서 집필 당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방문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모은 연보를 전달하는 이 방문은 단순한 자선 행위가 아니라,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확인받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방인 선교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정당한 것임을 로마서를 통해 체계적으로 논증했습니다. 특히 로마서 9-11장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이방인의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 속에서 설명하는 것은 이러한 목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B. 로마의 내부 문제를 주시하는 경우

1. 유대계와 이방계 기독교인의 갈등

로마 교회는 유대계와 이방계 기독교인들 사이의 복잡한 긴장 관계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를 넘어서 신학적 문제로 발전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글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A.D. 49)과 그 후 네로 황제 시대의 유대인 귀환은 로마 교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추방 기간 동안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던 교회에 유대계 기독교인들이 다시 돌아오면서, 교회 내 권력 구조와 신학적 우선순위에 대한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복음의 통합적 성격을 강조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롬 10:12)는 선언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본질을 드러내는 핵심 메시지였습니다.

2.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혼란

로마 교회 내에서는 구약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혼란이 존재했습니다. 유대계 기독교인들은 율법의 연속성을 강조했던 반면, 이방계 기독교인들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 문제를 정교하게 다룹니다.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선한 것이지만, 죄로 인해 인간을 정죄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의 의가 성취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율법을 완전히 폐기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율법주의에 빠지지도 않는 균형 잡힌 접근이었습니다.

3. 실천적 기독교 삶의 지침 필요성

로마서 14-15장에서 나타나는 “강한 자”와 “약한 자”의 문제는 로마 교회의 실제적 상황을 반영합니다. 음식 문제, 특별한 날에 대한 견해 차이 등은 표면적 문제였지만, 그 배후에는 신앙의 자유와 형제 사랑의 균형에 대한 깊은 신학적 질문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를 단순히 규칙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복음의 원리에서 해답을 찾도록 안내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주신 것처럼 서로 받아들이라는 권면(롬 15:7)은 교회 내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본질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지혜를 보여줍니다.

바울의 독특한 접근 방법

1.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신학 전개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전개합니다. 이는 다른 바울 서신들과 구별되는 로마서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1:18-3:20: 모든 인간의 죄 상태를 보편적으로 진단합니다. 이방인(1:18-32), 유대인(2:1-29), 그리고 전체 인류(3:1-20)의 죄를 차례로 다루며, 율법과 양심의 역할을 설명합니다.

3:21-5:21: 하나님의 의가 복음을 통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신칭의의 원리, 아브라함의 믿음,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를 통해 구원의 확실성을 논증합니다.

6:1-8:39: 칭의받은 자의 성화 과정을 다룹니다. 죄에 대한 죽음과 의에 대한 삶, 율법과 성령의 역할, 그리고 영화의 소망을 체계적으로 설명합니다.

9:1-11:36: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하나님의 주권과 신실성 안에서 해결합니다. 이는 바울 신학의 가장 깊은 통찰 중 하나입니다.

12:1-16:27: 복음의 실천적 적용을 다룹니다. 개인적 헌신, 교회 내 관계, 국가와 사회에 대한 책임 등을 포괄적으로 다룹니다.

2. 구약 성경의 창조적 활용

바울은 로마서에서 구약 성경을 단순히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이는 바울의 신학적 탁월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측면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4장):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통해, 이신칭의가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의 일관된 구원 방법이었음을 증명합니다.

다윗의 간증 (4:6-8): 시편 32편을 인용하여 죄 사함의 복이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호세아와 이사야의 예언 (9-11장): 구약의 예언들을 통해 이방인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일시적 거부가 모두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설명합니다.

이러한 구약 사용은 바울이 기독교를 유대교와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종교로 보지 않고, 구약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줍니다.

3. 개인적 고백과 목회적 심정

로마서는 신학적 논증서이지만, 바울의 개인적 고백과 목회적 심정이 깊이 담겨 있습니다.

9:1-3: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깊은 아픔과 사랑이 드러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는 고백은 바울의 진정한 목회자 심정을 보여줍니다.

7:15-25: 율법과 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바울 자신의 내적 갈등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이는 단순한 교리적 설명을 넘어서 실존적 고백이 됩니다.

15:14-33: 자신의 사역과 계획을 설명하면서 보여주는 겸손과 확신의 균형은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4. 실천적 적용의 구체성

바울은 교리적 설명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12장: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이 장은 1-11장의 교리적 설명이 어떻게 실제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영적 예배, 은사의 활용, 겸손한 관계 등이 구체적으로 다뤄집니다.

13장: 국가 권위에 대한 태도, 사랑의 실천, 종말론적 긴장감 등을 통해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설명합니다.

14-15장: 교회 내 갈등 해결의 원리를 제시하면서, 자유와 사랑의 균형,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로마서의 신학적 기여

1. 이신칭의 교리의 완성

로마서는 이신칭의 교리를 가장 체계적이고 완전하게 제시한 문서입니다. 바울은 이 교리를 단순한 구원 공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복음의 핵심으로 제시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1:17)라는 선언은 로마서 전체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의는 단순히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라,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의미합니다.

2. 구원의 확실성과 성화의 과정

로마서는 구원의 확실성을 강조하면서도 성화의 과정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8장에서 절정에 달하는 구원의 확신(“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은 6-7장의 성화 과정을 통해 얻어진 것입니다.

이는 값싼 은혜나 방종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면서도, 행위 의존적 구원관을 철저히 배격하는 균형 잡힌 접근을 보여줍니다.

3. 교회론적 통찰

로마서는 교회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속한 하나의 몸으로 제시합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개념이었습니다. 11장의 감람나무 비유는 이러한 교회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하는 이미지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단순한 종교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되는 새로운 인류 공동체로 이해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다문화, 다종족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현대적 의의와 적용

1. 복음의 보편성과 포용성

로마서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는 메시지는 오늘날의 다원주의 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복음이 모든 문화와 민족을 초월하는 보편적 메시지임을 보여줍니다.

현대 교회는 인종, 계층,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면서도 복음의 본질을 견지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로마서는 이러한 포용성이 복음의 핵심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 신학적 균형과 통합

로마서는 여러 신학적 주제들 사이의 균형을 잘 보여줍니다:

  • 교리와 실천: 1-11장의 교리적 설명과 12-16장의 실천적 적용
  • 개인적 구원과 공동체적 책임: 개인의 칭의와 교회 공동체의 역할
  • 현재적 축복과 미래적 소망: 현재의 성령의 역사와 미래의 영화
  •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선택 교리와 인간의 믿음

이러한 균형은 현대 교회가 극단적 입장들을 피하고 건전한 신학적 입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3. 선교적 정체성

로마서는 바울의 선교적 열정에서 나온 작품입니다. 복음은 개인적 경건에 머무르지 않고 “땅 끝까지” 전해져야 할 메시지입니다.

현대 교회는 로마서를 통해 진정한 선교적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전도 활동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삶으로 증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4. 사회적 책임

로마서 13장의 권위에 대한 교훈과 전체적인 사랑의 강조는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복음은 개인의 구원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체의 변화를 지향합니다.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불평등, 차별, 환경 문제 등)에 대해 기독교인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결론: 로마서가 주는 메시지

로마서는 바울의 개인적 상황과 로마 교회의 구체적 필요가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한 신학적 걸작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적 비전과 로마 교회의 실제적 필요를 모두 고려하여, 복음의 핵심을 가장 체계적이고 포괄적으로 제시했습니다.

이 서신이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독교 신학의 중심에 서 있는 이유는, 바울이 복음의 본질적 메시지를 시대를 초월하는 언어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단순한 개인적 경험이나 종교적 감정을 넘어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구원의 능력이며, 이는 모든 민족과 문화를 아우르는 보편적 메시지입니다.

로마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복음의 장대한 비전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실제 삶에서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교회는 이 복음을 붙들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추구했던 목표 – 복음의 순수성 보전, 교회의 연합, 선교적 확장 – 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과제입니다. 로마서는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신학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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