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고대 근동 지역에서 형성된 두 개의 중요한 종교법 체계인 아케나톤의 아톤 18계명과 기독교의 십계명은 인류 종교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기원전 14세기 이집트에서 탄생한 아케나톤의 종교개혁과 기원전 13세기경 시나이 반도에서 확립된 모세의 율법 사이의 관계는 십계명이 아케나톤의 아톤 18계명으로부터 직접적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라는 중요한 학술적 논쟁을 제기한다. 본 연구는 이러한 영향설의 근거와 타당성을 중심으로 두 법 체계를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직접적 영향설의 핵심 논거
시대적 근접성과 지리적 연관성
아케나톤(아멘호테프 4세)의 재위 기간은 기원전 1353-1334년으로, 모세의 출애굽 시기로 추정되는 기원전 13세기와 매우 근접하다. 더욱 주목할 점은 두 종교 지도자가 모두 고대 이집트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모세는 바로의 공주에게 입양되어 이집트 왕궁에서 40년간 성장했으며, 사도행전 7장 22절은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학문을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고 증언한다. 이는 모세가 단순히 이집트에 거주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 왕실의 최고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었음을 의미한다.
모세의 이집트 왕실 교육과 아케나톤 사상의 접촉
모세가 이집트 왕자로 양육된 시기는 아케나톤의 종교개혁이 이집트 전역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던 바로 그 시대였다. 아케나톤은 재위 4년경부터 종교개혁을 시작했고, 재위 9년에는 아톤을 유일신으로 선언하며 수도를 아케타텐으로 천도했다.
이집트 왕실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던 모세가 당시 이집트를 뒤흔든 이러한 종교개혁과 일신교 사상을 접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모세의 교육 과정에는 당시 이집트의 종교, 철학, 정치 체계가 모두 포함되었을 것이며, 아케나톤의 혁신적인 아톤 신앙 역시 그 핵심 내용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프로이트의 모세 이집트인설과 그 의미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939년 저작 『모세와 일신교』에서 모세가 아케나톤의 종교개혁에 참여한 이집트인이었다는 혁신적 가설을 제시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 모세는 아케나톤 집권기에 아톤 신앙의 사제였다
- 아케나톤 사후 이집트에서 아톤 신앙이 탄압받자, 모세는 히브리인들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했다
- 모세가 히브리인들에게 전한 종교는 본질적으로 아톤교의 연장선이었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가설은 현대의 일부 학자들(카를 아브라함, 로버트 페더 등)에 의해 더욱 발전되어, 모세가 바로 파라오 아케나톤 자신이었다는 과감한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계명 내용의 구체적 유사성 분석
아케나톤의 아톤 18계명
- 너희는 다른 신들을 질투의 신이자 창조주인 내(아톤) 앞에 있게 하지 말라.
- 신(아톤)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
-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 거짓된 맹세를 하지 말라.
- 너의 주 아톤 신의 날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 너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라.
- 살인하지 말라.
- 간음하지 말라.
- 물질적으로도, 마음으로도 도둑질하지 말라.
- 네 이웃에 속한 일체의 것을 탐내지 말라.
- 너의 의지를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
- 남을 심판(판단)하려 들지 말라.
-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를 기억하라.
- 신에게 행하는 모든 봉사를 거룩하게 여기라.
- 인류의 번영을 위해 신의 지혜를 본받으라.
-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 악행은 쉽게 드러남을 알라.
- 너희는 신이 창조한 어떤 인간도 노예로 부려서는 안 된다.
기독교의 십계명 (출애굽기 20장)
-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 절하지 말라.
-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 네 부모를 공경하라.
- 살인하지 말라.
- 간음하지 말라.
- 도둑질하지 말라.
- 네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하지 말라.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이웃의 아내, 남종, 여종, 소유물 등 포함).
아톤 18계명과 십계명의 직접 비교
아케나톤의 18계명은 기독교 십계명과 많은 조문에서 일치하거나 유사하며, 10가지 중복 항목 외에도 사회적 윤리와 인권, 봉사와 자유 등 현대적 가치와 관련된 추가 계명을 담고 있다. 두 계명 체계의 놀라운 유사성은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완전히 일치하는 계명들:
- 유일신 숭배: “다른 신들을 내 앞에 있게 하지 말라” (공통)
- 우상 금지: “형상/우상을 만들지 말라” (공통)
- 신명 존경: “신의 이름을 함부로/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공통)
- 특별한 날 준수: “아톤 신의 날/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공통)
- 부모 공경: “어머니와 아버지를/부모를 공경하라” (공통)
- 살인 금지: “살인하지 말라” (공통)
- 간음 금지: “간음하지 말라” (공통)
- 도둑질 금지: “도둑질하지 말라” (공통)
- 탐욕 금지: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공통)
십계명의 아홉 조항이 아톤 18계명과 거의 동일한 순서와 표현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로 설명하기 어렵다.
언어적 연관성: 아톤과 아도나이
프로이트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집트 신 “아톤(Aton)”과 히브리어 아도나이(Adonai) 사이의 어원적 유사성도 주목할 만하다. 히브리인들은 야훼의 원래 이름을 발음하지 않기 위해 “아도나이”를 대신 사용했는데, 이것이 아톤의 변형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실제로 이집트의 아톤 찬가와 히브리인의 쉐마 기도를 비교하면:
- 아톤 찬가: “Shema, Aton elohenu, Aton ehad” (들으라, 우리 신 아톤은 오직 하나인 아톤이시다)
- 쉐마 기도: “Shema, Adonay Elohenu, Adonay Ehad” (들으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다)
“아톤”이 “아도나이”로 치환된 것 외에는 구조와 표현이 동일하다.
종교개혁의 평행 구조
다신교에서 일신교로의 전환
아케나톤과 모세는 모두 기존의 다신교 체계를 거부하고 유일신 신앙을 확립한 종교개혁자였다. 이러한 일신교적 전환은 고대 근동에서 극히 드문 현상이었다.
아케나톤은 이집트 전통의 아문을 비롯한 모든 신들을 폐지하고 아톤만을 숭배하도록 명령했으며, 모세 역시 히브리인들에게 야훰 외의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엄명했다. 두 개혁 모두 기존 종교 권력과의 충돌을 야기했고, 새로운 사회 질서의 확립을 목표로 했다.
종교적 배타성과 정체성 확립
아톤교와 야훼 신앙 모두 극도의 배타성을 특징으로 한다. 아케나톤은 다른 신들의 이름과 상징을 파괴하도록 명령했고, 십계명 역시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며 절대적 배타성을 요구한다.
이러한 배타적 일신교는 종교적 정체성을 통한 공동체 결속이라는 공통된 목적을 지닌다. 아케나톤은 아톤 신앙을 통해 이집트를 통합하려 했고, 모세는 야훼 신앙을 통해 히브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했다.
영향 전승의 구체적 경로
이집트 내 종교적 지하수맥
아케나톤의 사후 아톤 신앙이 공식적으로 탄압받았다고 해서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 종교적 혁신은 지하에서 계속 전승될 수 있으며, 특히 이집트 왕실에서 교육받은 지식층 사이에서는 아톤 신앙의 핵심 사상이 은밀하게 보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모세가 이집트 왕자로서 받은 교육에는 아케나톤 시대의 종교적 혁신에 대한 지식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금기시되었지만, 학술적 관점에서 아톤 신앙의 신학적 내용과 율법 체계는 여전히 연구되고 논의되었을 것이다.
히브리인 공동체의 수용 가능성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다는 성경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집트 사회의 다양한 계층에 분포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셉의 사례에서 보듯이, 일부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의 고위직에 진출하기도 했다.
아케나톤의 종교개혁 시기에 히브리인 지식층이 아톤 신앙에 노출되었고, 이들이 모세의 종교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모세의 십계명이 아톤 18계명과 이토록 유사한 것은 이러한 문화적 전승과 재해석의 결과로 볼 수 있다.
학계의 지지 논거와 증거들
고고학적 발견과 문헌학적 증거
영국의 이집트학자 플린더스 페트리(Flinders Petrie, 1853-1942)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모세의 십계명과 아케나톤의 계명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해왔다. 페트리는 모세 십계명의 원전이 되는 역사적 자료로 아케나톤의 18계명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특히 아마르나 문서들에서 발견되는 종교적, 윤리적 내용들은 후대의 히브리 종교 전통과 놀라운 일치점을 보여준다. 아케나톤 시대의 찬송가와 기도문들은 구약성서의 시편과 구조적, 내용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비교종교학적 관점
현대 비교종교학은 종교간 영향과 전승을 당연한 역사적 현상으로 인정한다. 특히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시대적으로 연결된 종교들 사이의 상호 영향은 예외가 아니라 일반적 규칙이다.
아케나톤의 아톤교와 모세의 야훼교 사이의 관계는 이러한 종교사적 전승의 전형적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후대의 종교가 선행하는 종교적 혁신을 수용하고 재해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반박 논리에 대한 재고찰
시간적 간격 문제의 재검토
일부 학자들이 제기하는 “아케나톤 사후 즉시 아톤 신앙이 소멸되어 모세에게 전달될 수 없었다”는 반박은 종교적 전승의 복잡성을 간과한다.
공식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은밀한 차원에서의 전승은 충분히 가능하다. 특히 모세처럼 이집트 왕실에서 최고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라면, 비록 금기시된다 하더라도 아케나톤 시대의 종교적 혁신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신학적 차이점의 재해석
“아톤교와 야훼교의 근본적 신학적 차이”를 강조하는 견해도 종교적 적응과 발전의 관점에서 재고될 필요가 있다. 모세가 아톤교의 핵심 사상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인의 역사적 경험과 민족적 정체성에 맞게 재해석하고 변형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창조신 아톤이 역사의 주관자 야훼로 변모한 것, 우주적 태양신이 민족신으로 특화된 것은 모두 종교적 토착화 과정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결론: 영향설의 타당성과 의미
아케나톤의 아톤 18계명이 기독교 십계명에 미친 영향은 다음과 같은 종합적 증거들을 통해 강력히 뒷받침된다:
- 시공간적 근접성: 동일한 이집트라는 공간에서 불과 한 세기 차이로 나타난 두 종교개혁
- 모세의 이집트 왕실 교육: 아톤 신앙에 노출될 수 있는 직접적 경로
- 놀라운 내용적 유사성: 십계명 중 아홉 항목이 아톤 18계명과 거의 동일
- 언어적 연관성: 아톤과 아도나이의 어원적 유사성
- 종교개혁의 평행 구조: 다신교에서 일신교로의 동일한 전환 패턴
이러한 영향 관계는 십계명의 가치나 의미를 축소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십계명이 인류 종교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형성된 보편적 윤리 체계임을 보여준다. 아케나톤의 혁신적 시도가 모세를 통해 더욱 완성된 형태로 발전하여 인류 문명의 도덕적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십계명은 아톤 18계명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히브리인의 역사적 경험과 신앙적 성찰이 가미된 창조적 계승이자 발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아케나톤의 아톤 18계명과 기독교의 십계명은 인류의 종교적, 윤리적 진보를 보여주는 연속된 두 단계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